915 Industry Gallery
the first last scene
16 April 2015 - 25 April 2015
 

숭고한 라스트 씬

이건수 | 미술비평 전시기획

캔버스 위에 떨어진 희석된 아크릴 물감은 스스로 꿈틀댄다. 얇은 막으로 얼룩진 흔 적은 우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중력과 삼투의 법칙이 적용된 지극히 필연적인 흡수의 결정체다. 시간의 지속성과 운동의 연속성을 머금은 이 컬러풀한 문양 속에서 당신의 기억 아래 침전된 도식적 형상들의 앙금을 연상하는 일은 덧없다. 동공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유령같은 색채의 입자들, 그것들이 어느 지점에서 숨을 멈추었는가를 목격하는 것이 올바른 그림읽기이다. 색채와 형태의 삶과 죽음을 한 화면 안에서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은 회화를 고정되고 박제된 이미지의 무덤에서 해방시키는 기쁨이 된다. 해체와 소멸을 지향함으로써 생 명력을 얻는 패러독스의 드라마가 지안의 화면 속에 있다. 그것이 철저히 추상적으로 보인다 해도 일종의 내러티브와 플롯 구조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그것은 그림의 시작과 끝이 그대로 기록되는 회화이며 따라서 회화의 구조와 제작과정이 결합되어 있다.

지안은 자신의 작업의 우연적인 요소를 초현실주의자, 특히 에른스트(Max Ernst) 의 자동기술법(Automatism)과 같은 유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유기적이고 불확정적인 형상의 생명성, 유동적이고 자발적인 색채의 비합리성은 자동기술의 효과와 생태를 상당한 정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선택하는 색상과 안료의 농담을 어찌 전적으로 반이성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운용했다 할 수 있겠는가. 개념의 집합인 말(words)을 구성적 요소로 하는 문학과 달리 색채와 형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고수하는 회화에서 자동기술적인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전면적으로 표현하긴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형식적으로 보아 지안의 화면은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나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의 얼룩지고 스며든 형상의 스테인 페인팅(stain painting)에 닿아 있다.

폴록(Jackson Pollock)의 공격적인 촉각성, 뉴먼(Barnett Newman)과 로스코(Mark Rothko)의 명상적인 상징성을 벗어난 의미에서, 실질적인 ‘평면성’을 획득한 탈(脫)회화적 추상(Post Painterly Abstraction)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염기법에 의해 캔버스의 올에 스며들며 밀착하는 안료는 물질(현실)이면서 동시에 이미지(초현실)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지안의 얼룩그림은 자동적이기 보다는 자연적이다. 더 깊게 말하면 자생적이다. 지안은 하나의 마당을 장악하는 사제가 되어 모든 업보의 씨앗인 색채를 던져 놓는다. 인연의 동인이 되는 색채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의 인과율 속에서 자신의 제의를 펼쳐간다. 색채는 스스로 변화하고 생성하면서 삶의 궤적을 그려간다. 여기서 작가가 하는 일은 어떤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마련하고 그 사건의 벌어짐을 같은 시공간 속에서 체험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남겨진 형상과 색채의 존재론적 음성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감각적 언어로 번역하고 해석해주는 일이다. 작가의 사제적 행위가 형상과 색채 스스로의 카타르시스와 정화를 화면 위에 만들어 놓고 있다.

지안의 화면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색채의 유영(游泳)과 유희는 고정하려하고 구분지으려는 모더니즘의 틀을 해체하려는 의도를 지닌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이다. 형상의 지속적인 변형은 육신화(incarnation)를 거부하는 색채의 정신을 역동적으로 드러낸다. 형상이 색채가 되고, 색채가 형상이 되었던 마티스(Henri Matisse)의 위대한 평면성을 경계 없는 뒤섞음으로 풀어 놓고 있다. 양 극단의 중간적 수치로서의 서양적 중용(中庸)이 아니라 따뜻함과 차가움, 멈춤과 나아감, 생겨남과 사라짐, 카오스와 코스모스,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가변적이고 다이내믹한 중용이 얼룩져 빛난다.